다시 태어나다
어떻게 될 것인가?
다시 태어나는 방법
그것은 천국이냐 지옥이냐 –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이 모든 인류의 영혼을 위한 두 가지 영원한 운명을 가르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히브리서 9:27). 천국 아니면 지옥(로마서 2:6-8 / 요한계시록 21:8 / 마태복음 25:46 / 로마서 6:23 / 마태복음 25:31-46). 천국은 예수님이 왕이신 놀라운 곳입니다. 당시의 불멸의 몸에는 고통과 괴로움이 없으며 우리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지옥은 고통과 불과 유황(요한계시록 20:10)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다시는 떠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계획은 “거듭남”이라는 계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갈보리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묻히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때 이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는지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 개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목사님이 늘 말씀하셨듯이 “그것은 당신 손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요한복음 3:3-5). 우리가 구원받고 천국에 가서 하나님의 왕국을 보고 싶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거듭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니고데마는 요한복음 3장 4절에서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5절과 6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라. 그리고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예수님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당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자연적(혹은 육체적) 탄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영적인 탄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새 탄생”(“거듭남”)에는 물의 요소(물 세례)와 영의 요소(성신의 충만)가 포함됩니다. 이것이 정말로 구원 계획의 일부라면, 우리는 교회가 처음 탄생한 사도행전에서 그 내용이 전파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야 합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사도행전 전체에서 물침례와 성령의 “새 탄생”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성령의 약속을 기다리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 사도행전 1:4-5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 위로부터 능력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사도행전 1:8
많은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오순절 날까지 예루살렘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예언대로 위에서부터 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4절은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한마음으로 한 곳에 모였더니”라고 선언합니다. 그러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에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라. 그러자 그들이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자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이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 사도행전 2:12 그들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요? 그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그러자 베드로는 일어나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목적이라고 전파했습니다! 베드로는 너무나 강력하게 설교했고 그 확신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왕국(혹은 “구원의 계획”)의 열쇠를 주신 이유가 완벽하게 이해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오순절 날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될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읽어 보면 오순절에 베드로의 말을 들은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고 그가 전파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후에 그들은 사도행전 2:37에서 베드로에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누군가를 믿고 구원받기를 갈망하지 않는 한, 그들은 구원의 다음 단계가 그들에게 밝혀지도록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믿음과 진심을 알아채고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거듭남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물세례와 성령 충만)
사도행전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것은 분명히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이 구원의 계획은 누구에게 제공됩니까? 베드로는 계속해서 이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행 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그분의 왕국으로 부르고 계시듯이 구원의 메시지와 천국에 들어가려는 계획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것을 '영원한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모든 인류를 유대인, 사마리아인(반은 유대인), 이방인(지구상의 모든 사람)이라는 세 가지 범주로 분류합니다. 사도행전에는 세 가지 범주가 모두 "거듭남"이라는 예가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구원의 계획은 누구든지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요한계시록 22:17
우리는 사도행전 8:14-17에서 동일한 “거듭남”(물세례와 성령)의 구원 계획을 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존: 그들이 내려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니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뿐이더라.) 이에 두 사람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으니라.”
다시, 우리는 사도행전 10:44-48에서 동일한 “거듭남”(물 세례와 성령) 구원의 계획을 봅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라.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그들은 성신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주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명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그에게 며칠만 머물도록 기도했습니다.”
다시, 우리는 사도행전 19:1-6에서 동일한 “거듭남”(물세례와 성령) 구원의 계획을 봅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동안 바울은 윗지방으로 다녀가다가 에베소에 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이르시되 너희가 믿을 때부터 성령을 받았느냐 하시니 [이 본문을 보면 사람이 단순히 예수를 "믿는" 시점에서는 성령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이 그에게 말하되, 우리는 성령이 계시는지조차 듣지 못하였노라.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면 너희는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그리고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위하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말했습니다.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곧 그리스도 예수라.”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니 그들은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습니다.”
여기 사도행전의 주제가 보이시나요?
당신이 유대인(행 2장)이든, 사마리아인(행 8장)이든, 이방인(행 10장)이든 = 모두 같은 방식으로 구원받았고/또는 “거듭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죄를 믿고 회개하는 데 필요하고 분명한 첫 단계를 밟았습니다(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구원의 계획을 모두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성신을 받고, 다른 방언으로 말함으로써 증거됩니다. 심지어 바울도 가르쳤습니다(행 19:1-6) = 예수의 이름 세례와 성령 충만, 다른 방언으로 말함으로 증거됨 - 구원의 계획과 "거듭남"의 메시지!
나는 (구원받기 위해) 믿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문맥에서 벗어나 몇 가지 성경 구절을 선택하고 이를 중심으로 전체 교리를 세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모든 것을 지키라”고 우리에게 지시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믿는 것”만 하면, 마귀도 구원받고 천국에 갈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은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고 분명히 말합니다. 잘하는도다 마귀들도 믿고 떠느니라.”
분명히 악마는 천국에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것”만이 구원의 전체 계획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단 하나의 성경 구절 - 구원을 받으려면 단순히 “믿는 것”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마가복음 16:16에서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와! 만약 우리가 “단순히 믿는 것”에서 그쳤다면 어떨까요? 물침례가 우리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내용은 읽지 않았습니다.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매우 분명한 성경적 계시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세례의 중요성에 대한 더 많은 증거를 원하십니까?
베드로전서 3:21 “이제 세례도 우리를 구원하는 것과 같은 이가…”
이보다 더 명확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종종 문맥에서 벗어난 일부 구절:
성경에서 가장 잘못 인용된 성구 중 하나는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멸망하지 아니하리라"고 잘못 인용하고 있지만, 이 구절은 그렇지 않습니다.
"멸망하지 말아야 한다"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문구는 믿음으로 구원의 여정을 시작했음을 의미하지만, 그 여정에는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오직 믿음만이 여행의 결론이 아니라 시작일 뿐임을 암시합니다.
사도행전 16:30-31 “저희를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의 집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멈추고 이것을 구원의 전체 계획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쉬운 믿음주의'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 이론에는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먼저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도행전 16:32-33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니라. 그리고 그 밤 바로 그 시간에 그들을 데려다가 그들의 줄무늬를 씻어 주었다. 그리고 그와 그의 모든 사람이 곧바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참고 사항: 제자들은 이 가족에게 구원을 받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믿는 것"뿐이라고 결코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믿는 것"이 이 구원 계획의 시작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32절에서 입증됩니다. 그들은 “믿는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계속해서 그들에게 “주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이 “주의 말씀”에는 틀림없이 “거듭남”이라는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날 밤 이 가족 전체가 침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오해된 구절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 구절을 읽고 나면, “구원”은 단지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는 것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이론이 올바른지 확인하려면 몇 구절을 더 읽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하리라.”
행 8:13 “이에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고 빌립과 함께 지내며 그 일어나는 표적과 표적을 보고 기이히 여기더라.
행 8:18-23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내어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성신.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당신에게 아무 몫도 없고 분깃도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 보시기에 당신의 마음이 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죄악에 매여 있느니라.”
마태복음 7장 21절에 따르면, 예수를 자기 삶의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8:13 및 사도행전 8:18-23에 따르면 =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죄악의 결박 속에 있는 것이 가능합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불의의 결박 속에 있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들을 어떻게 조화시키나요?
성경은 스스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는 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겉으로 보기에는 달라 보이는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과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주로 고백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우리는 그분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유효하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믿고 고백하는 데 그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시몬처럼) 믿고 세례 받는 일을 멈출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참된 “신자들”에 대해 말씀하신 것과 일치합니다. 자신이 진정한 “신자”인지 아닌지를 증명할 수 있는 성경적 표시가 있다면 좋지 않을까요?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자"라는 용어를 듣고 그 정의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신자"를 정의하도록 합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7:38-39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니 이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참고: 성경에서는 "신자"를 성신을 받을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잘못된 가정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성신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을 받은 표는 방언으로 말함을 통해 증거된다고 가르칩니다(행 10:44-48, 행 2:1-4, 막 16:17, 사 28:11-12 참조). .
사도행전 19장 2절에서 바울은 특정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또는 그 후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는 성령이 계시는지조차 듣지 못하였노라 하더라.” 분명히 이 제자들은 주님을 “믿었지만” 아직 성신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 표는 단순히 “믿는 것”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을” 때 성령으로 충만해지지 않았다는 또 다른 증거는 사도행전 8:5-17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큰 부흥을 일으켰고, 그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자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12절은 확증합니다. 그들은 빌립이 하나님 나라에 관해 설교하는 것을 믿었고, 또한 빌립이 행하는 기적을 보았고, 귀신이 쫓겨났고,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 도시에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 베드로와 요한은 특히 그들이 성신을 받을 수 있도록 그곳으로 보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성신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안수했을 때 그들은 마침내 성령을 받았고 의심할 바 없이 방언을 했습니다. (이는 그 기적을 보고 시몬이 안수로 같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돈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 (마법사에게) 마음속으로 주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조용히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매혹적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방언으로 말함; 그것은 바라는 바대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기적입니다.
사도행전 2:33은 성령을 받을 때 보고 들을 수 있는 사건임을 더욱 입증합니다. 사도행전 2장 3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현실을 직시하자; “믿거나” 조용히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기로 선택하면 그 누구도 아무것도 “보거나” 듣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이것은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전에 “성신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나요?”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답변은 다양하지만 대개 다음과 같이 들립니다. “내적으로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받은 것으로 압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저에게 저녁을 요리해 줄 때면 저도 속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성신의 영향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의 생각이나 사람의 전통을 따르기보다는 성경을 우리의 지침으로 삼읍시다.
마가복음 16:17-18 선언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라. 내 이름으로 그들은 마귀들을 쫓아낼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방언[혹은 배우지 못한 새로운 언어]로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뱀[혹은 악귀의 요새를 뿌리 뽑을]을 취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독한 것을 마셔도 [물론 우연히]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어 회복할 것입니다. [또는 기적과 치유의 은사를 행할] 것입니다.
이제 = “이적을 구하는 악하고 패역한 세대”(믿기 위해). 그러나 우리는 전혀 표지판을 따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징후는 우리를 따라오고 있습니다! 이 표지판이 당신을 따라오고 있나요?
위에 나열된 구절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신자”를 정의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그를 믿고 고백하는 사람으로 정의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또한 방언을 말하고, 악마를 쫓아내고, 악마의 요새를 뿌리 뽑고, 때때로 기적적으로 보호를 받으며, 영의 은사가 그들의 삶을 통해 작용하도록 허용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참된 믿음은 항상 믿는 사람들의 편에서 행동을 낳습니다.
야고보서 2:14-22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사람이 믿음이 있다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형제나 자매가 벌거벗고 일용할 양식이 부족한 경우, 너희 중 한 사람이 이르되 평안히 가라.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습니다. 무슨 이익이 있나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너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당신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잘하는도다 악마들도 믿고 떠느니라 그러나 오 헛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네가 알겠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느냐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우리의 “행위”가 우리가 천국에 가는지 여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다음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을 읽고 예수 그리스도(재판관)가 “내가 네 행위를 안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말해 보세요.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께 매우 중요하며 천국을 영원한 본향으로 삼을지 여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를 계속 구원할 수는 있습니다. 일의 부족(우리 아버지의 일에 바쁘기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감사가 부족함을 분명히 보여줄 것입니다. 틀림없이 감사하지 않는 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분명히 하나님 보시기에 처음 사랑을 떠난 마음의 모습을 그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구원 계획에 순종할 때 그분의 자비와 은혜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순히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분주하게 일해야 합니다.
당신은 복음을 “믿지만” 복음에 “순종”했습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복음에 “순종”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성경은 설명합니다.
복음 = 간단히 말해서: 갈보리에서 - 예수 그리스도는 세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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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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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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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다시 부활하셨습니다(셋째 날) - I Cor. 15:1-4
이제 = 데살로니가후서 1장 8-9절에 주어진 경고를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불꽃 가운데서 형벌을 주시리니 저희가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라. 주님의 임재…
분명히 복음을 “믿는” 것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복음에 “순종”하는 것은 또 다른 일입니다. 복음에 “순종”한다는 것은 단순히 복음을 “실행”하거나 “적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복음을 "실행"하거나 복음을 "적용"할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실 때 무엇을 하셨나요? 이것이 우리가 그분을 따르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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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망했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로 (영적으로) 죽어야 합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혹은 회개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 고린도전서 15:31
2. 그는 묻혔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와 함께(영적으로) 장사되었습니다. – 로마서 6:4, 사도행전 22:16 (세례에서 우리는 주의 이름, 즉 "예수"를 문자 그대로 불러야 합니다[또는 말로 말해야 합니다].
3. 그는 다시 일어섰다 / 그러므로 우리는 (성신에 의해) 생명의 새로움 안에서 (영적으로) 다시 일어납니다. – 로마서 6:4 및
로마서 8:11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라"면.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우리 삶에 “순종”(또는 적용)하려면. 우리가 사도행전 2:38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행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죽어)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장사됨)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아니면 당신 안에 부활의 능력을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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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침례와 성신을 받는 것이 행위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가 의로운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입니다.
그러나 디도서 3장 5절은 세례와 성령을 받는 것이 “의의 행위”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물세례)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신사 숙녀 여러분,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공하려면 믿음과 고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물침례와 성령 충만도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는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에 의해 “구원”된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성경은 그것을 다른 시각으로 묘사합니다.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었으며 온 집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자선을 많이 베풀고 자주 하나님께 기도하여 천사를 불러냈고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기념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신에게는 그 사람이 '구원된' 것처럼 들리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그가 진실하고 독실하고 경건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물(세례)과 성령(성령의 충만)으로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고넬료는 베드로와 연결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그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알려 줄 것입니다. 사도행전 10:44-48에 따르면 고넬료는 마침내 그가 찾던 구원을 찾았습니다!
십자가 위의 도둑
많은 사람들은 왜 십자가 위의 강도(누가복음 23:38-43)가 (사도행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구원받기 위해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을 필요가 없었는지 궁금해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의 "거듭남" 계획이 예수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다시 부활하실 때까지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십자가 위의 도둑은 "교회 시대"(즉, 은혜의 시대)에 살고 죽지 않았습니다. 교회 시대는 오순절 날까지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도둑은 오늘날의 방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모든 경륜의 시대에는 고유한 구원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율법"이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방주만이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교회 시대", "은혜 경륜" 동안)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초대 교회가 순종했던 것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결론
신사 숙녀 여러분 – 사람이 말하는 대로가 아니라 경전에서 가르치는 대로 거듭나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설교자들은 당신이 듣고 싶은 것을 무엇이든 말해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속았거나 단순히 당신의 돈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 예언 쇼 팀은 모든 사람이 거듭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신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작성자: Rev. 브라이언 스미스